규제가 만든 과학, 갈등하는 법정 : 고춧가루 원산지 판별의 법정논란을 중심으로

Abstract

이 글은 농산물 원산지 검정체제의 기틀을 이루는 과학적 검사방법이 확립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특히 고춧가루 원산지 검사방법 가운데 하나인 근적외선 분광분석(NIRS)이 법원 재판의 과학적 증거로서 논란이 된 사건들을 사례로 삼아, 이 영역에서 과학지식들이 생산되고 해체되는 동시에 ‘산지의 경계’가 함께 구성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WTO 체제가 들어선 1995년 이후, 수입산 농산물 시장 개방에 대응해 국내 농산물 시장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새로운 규제정책인 원산지 표시제도가 도입된다. 고춧가루 시장의 경우, 주로 중국산 농산물의 국산 둔갑을 겨냥해 이 규제제도가 활발하게 운영되었다. 농산물 원산지 표시제도는 국내산과 수입산 농산물간 차이를 증명하는 과학적 기법의 개발로 이어졌는데, 이 때 농산물의 ‘성분 분석’기술로 활용되어 오던 근적외선 분광분석법이 ‘산지 구분’기술로 도입된다. 이후 원산지 표시 규제 당국은 중국과 국내에서 각각 다양한 시료를 모은 뒤 근적외선 스펙트럼 구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판별식을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러나 원산지 검정체제의 핵심을 이루던 과학적 검사방법 가운데 하나인 근적외선 분광분석 방법의 과학적 증거능력은 2007년 이후 법원 재판과정에서 오류가능성, 전처리 과정의 비표준화, 통계적 해석의 임의성 문제가 지적되고, 나아가 ‘원산지 경계’의 기준으로 삼아온 근적외선 스펙트럼 수치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란 점이 확인되면서 과학적 증거로서의 증거능력을 상실한다. 근적외선 분광분석법에 의한 원산지 구분 시도는 과학지식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원산지 차이에 대한 과학적 사실 또한 만들어 나갔다. 국산과 중국산 고춧가루의 경계를 나누는 과학적 기준이 모호했지만, 원산지 단속결과를 알리는 정부의 보도자료와 언론보도, 신토불이 신화 등이 결합되면서 확고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국내산 농산물’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만드는데 동원되었다. 원산지 표시제도의 도입은 수입산 농산물 개방에 맞서 국내 농산물 시장을 수성하겠다는 수세적 입장에서 나왔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국내산 농산물의 품질 표준화와 식품 안전성 확보전략 대신, 비교적 단시간 내에 가능한 ‘산지 구분’을 통해 수입산 농산물을 국내 시장에서 배제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농산물 원산지 판별기법은 개발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원산지 경계의 표준’이 생산된다. 이는 ‘우리만의 것’이 존재한다는 국민적 믿음의 정치적 실천인 90년대 후반 ‘신토불이’ 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러한 당대의 사회문화적 맥락은 원산지 경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원산지 구분이 가능한지 여부’보다는 ‘원산지 구분으로 판단하기 위한 근거 찾기’에 몰두하는 경향을 설명하는 배경이 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국산 고추 품종이 중국내에서 대거 재배되고 품질도 크게 향상되면서 고춧가루의 지리적 차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일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생물학적, 화학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중국산과 국내산 고춧가루의 경계는 점점 더 흐릿해졌다. 그러나 농산물 품질관리원 시험연구소는 최근 근적외선 분광분석을 대체할 새로운 원산지 판별 기법으로 나노 박테리오파지 기반의 농산물 특정 지표 수용체 개발에 착수하는 등 ‘원산지 경계 만들기’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